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2025년 초여름 쯤이었던가요. 일본에 대지진이 온다는 이야기와 함께, 한 예언가의 이야기가 기사에 실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타츠키 료라는 만화가가 꿈에서 봤다는 겁니다. 2025년 7월 5일, 큰 운석이 떨어져 해일이 오고, 자신을 포함한 일본인 3분의 2가 사망한다는 거에요.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기사까지 되었는고 하니, 이 사람이 사실은 2011년에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도 꿈에서 봤다는 겁니다.
이 기사를 보고, 2025년 7월 4일 후쿠오카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죽고 싶어서 그러냐구요? 아닙니다.
백보 양보해 그녀의 예언이 정말 100프로 맞는다고 해봅시다. 그때 떨어져야 하는 운석의 크기는 공룡을 멸망시킨 것의 적어도 몇 배는 되어야 합니다. 공룡을 멸망시킨 그 운석이 떨어진 때로 추정되는 전세계의 지층에서 식물의 잿더미가 발견됩니다. 운석 충돌 후 1시간 내에 전 지구의 숲이 불타고 있었을 거라고 합니다.
그 말인즉슨… 그 예언을 믿는다면 한국 서울에 있는 것은 안전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거에요. 사실상 지구 어디에 있어도 쉽지 않습니다.
...
그래도 그렇지, 굳이 찝찝하게 그때 왜 가냐구요?
항공권과 숙소가 상대적으로 저렴해져 있었습니다. 대만에서도 어떤 풍수 지리사가 그 예언을 긍정하는 발언을 했던 모양입니다. 실제 가서 들었습니다만, 해외 관광객이 확연하게 줄었다고 합니다. 회전 초밥 집의 장인 분이 그 얘길 하면서 불평하더라구요.
아주 민폐에요. (いい迷惑ですね。)
예언 같은 걸 안 믿는 저같은 사람한테는 땡큐였죠.
후쿠오카는 부산과 매우 가깝습니다. 직선거리로 제주도보다 가까워요.
그러다 보니 한국인 관광객이 굉장히 많고 그게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도시입니다. 그러니 한국어 지원의 비율이 압도적이라고 느껴집니다. 메뉴판 뿐만 아니라 사소한 안내문까지 기본 한국어를 써둡니다. 오히려 일본인에게는 상식인 규칙을 한국인에게만 알리기 위한 안내도 많았습니다.
“편의점 계산대는 바닥의 표시에 따라 줄을 서 주세요” 같은 것들이요.

후쿠오카는 일본에서 5위에서 6위권의 대도시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도시에 적합한 인프라가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물가까지 엔저 영향으로 싼 편이죠. 이런 사정이 있다 보니 여행 난이도로 보면 제주도보다도 쉽다고 느껴집니다.
도착 다음 날, 대망의 7월 5일이었습니다. 예언은 (당연히도) 적중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조금 심심해졌습니다. 동네가 너무 한국 같았어요. 그래서 온 김에 이 동네의 역사를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유튜브 검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뜻밖에 굉장히 마음아픈 동시에 흥미로운 역사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시절, 한국인들은 소위 “본토”라고 불리던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끌려가서 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반대로 일본인들 중에도 한반도로 건너와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잠깐 넘어오는 게 아니라 일가족을 이끌고 아예 터를 잡으러 오는 겁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두 발의 원자폭탄과 함께 일본이 항복 선언을 했고, 한국에게 그것은 광복을 뜻했습니다.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이 부산에 몰렸습니다. 반대로 일본 열도에 있던 한국인들은 후쿠오카에 몰려들었습니다. 대한해협을 건너는 배를 타기 위해서죠.
당시 일본에는 200만명에 달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후 단 1년 사이에 후쿠오카의 하카타항에서만 50만명이 귀국을 하게 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배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불법 판자 배로 넘어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는데요. 당시 한반도도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는 혼란기였다고 합니다. 그 소식에 귀국을 포기하는 사람도 나왔다고 합니다. 결국 배를 기다리는 사람과 귀국을 포기한 사람들은 항구 주변에 판잣집을 짓고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카타항 근처 이시도가와(石堂川)양안에 2000호 가까운 반 수상 판자촌이 형성됩니다. 이때 현재의 남한 계열인 민단과 북한 계열인 총련이 이미 나뉘어, 이시도가와를 가운데 두고 민단은 서안, 총련은 동안에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다른 한 편,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귀국한 사람들 중에서는 사실은 한반도가 고향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30년이 넘는 일제 치하, 한반도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의 자식 세대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고향이 어느 순간부터 고향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후쿠오카에 건너와 자리를 잡는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두 집단 모두 후쿠오카라는 땅에 새롭게 적응해야 했습니다.
당시 한국계 난민 중에 김방자라는 분과 김휘강이라는 이름의 모녀가 있었습니다. 일본어로는 기무 요시코, 기무 테루에라고 읽는 이 모녀는, 먹고 살기 위해 호르몬(소곱창) 야키니쿠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개점 초, 손님이 적어 호르몬을 팔지 못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한국식 빨간 양념을 해서 양념곱창구이를 팔기 시작했는데요. 이것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맥주에 잘 어울린다고 소문이 났다고 해요. 그 작은 가게는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야키니쿠 체인, 겐푸칸(玄風館)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카와하라 토시오(川原俊夫)는 일제시대 부산 초량에서 태어난 일본인입니다. 만주에 거주하던 그는 징집되어 오키나와 쪽으로 배치되던 중 종전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쿠오카로 귀국하게 됩니다. 대한해협을 건너면 자신의 고향인 부산이 있는 도시에 자리잡은 것입니다. 이때까지도 그는 어릴 때 부산에서 먹었던 명란젓의 맛을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명란젓 문화가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는 이것을 일본인 입맛에 맞게 바꾸어 일본식 명란젓을 만들어 팔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후쿠오카의 대표 명물로 자리잡은 명란(멘타이코, 明太子)입니다. 그가 만든 가게 후쿠야(ふくや)역시 현재까지 후쿠오카 명란젓의 원조 브랜드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후쿠오카는 그 지리적 특성에 의해서 한국과 아주 많은 교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근현대 이전에도, 조선 시대에도 그 전의 삼국 시대에도 일본에 오는 통신사나 사신, 기술이민자 등도 빠짐없이 후쿠오카를 거쳐 당시 수도였던 교토 쪽으로 이동했다고 하니까요.

P.S. 재밌게도, 후쿠오카는 하카타 라멘이라고 하는 굉장히 강한 돈코츠 라멘으로 유명한데요. 국물이 끈적할 정도로 진한, 강한 돼지 냄세를 풍기는 음식입니다. 한국인들 중에서 이것을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바로 돼지국밥의 도시 부산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상당히 비슷한 결의 맛이 난다고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줬는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주 비슷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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